발리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선셋 서핑을 했다. 매일 뜨는 해를 바라보며 파도를 탔는데, 이날은 뜨는 해와 지는 해 모두를 바다 위에서 맞이하고 마중했다. 서쪽 바다의 일몰은 붉다. 해변가는 선셋을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서퍼들은 해를 바라보고 앉아 있다. 그림자진 뒷 모습은 누가 누구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해가 지고 난 뒤엔 하늘과 바다의 색이 구분되지 않고 파도의 일렁임도 잘 보이지 않는다. 경계가 없는 시간이다. 프랑스에선 이 시간을 L'heure entre chien et loup라고 부른다.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모든 것이 모호해진 이 순간 ‘익명의 서핑’이란 단어를 생각했다. 누가 누구인지 분간되지 않다는 사실이 나에게 자유를 준다.
아무도 강요한 적 없지만 해가 떠 있는 선명한 시간의 서핑은 잘 타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든다. 서퍼들의 얼굴도 라이딩도 또렷하고 모든 것이 정확해 보여서 나도 정확해야 할 것 같은 기분. 특히 영상을 찍으며 탈 땐 부담감과 함께 욕심도 생긴다.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고 그 만큼 실망도 크게 한다. 하지만 경계가 없는 시간, 익명의 서핑은 다르다. 정확하지 않아도 또렷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란 묘한 안도감이 든다. 제대로 타지 못해도. 파도만 잡아도 즐겁다. 나는 지금 아무개 서퍼 1이다.
하늘엔 이틀 내내 같은 자리에 연이 떠있다. 아마도 나무에 묶어둔 것 같단 이야길 들었다. 그 옆으론 수많은 비행기가 저 먼 하늘에서 날아와 착륙한다. 몇 시간이나 좁은 비행기에 앉아 있었을 사람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그 위에 떠있는 서퍼들을 보며 이제 발리에 도착했음에 설레는 그들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덩달아 나도 두근거린다. 조금 시선을 돌리자 지구 위로 타원을 그리며 지나가는 제트기가 보인다. 비행운이 마치 별똥별 같다. 다시 바다로 시선을 내린다. 덕다이브를 하고 나오는 경현이가 너무 예뻐 넋을 놓고 봤다. 파도 거품이 지나간 뒤 솟아나는 얼굴에 붉은 햇빛이 부딪히며 부서졌다. 어떻게 바다에서도 예쁠 수 있을까. 쉽게 산발머리가 되는 나에겐 미스터리다.
해가 완전히 지구 뒤로 넘어갔다. 잔광을 빛 삼아 파도를 잡은 서퍼들이 하나 둘 바다를 떠난다. 나와 경현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하나만 타고 나가야지. 라고 생각한 뒤엔 그 하나가 참 어렵다. 해변가가 조명으로 빛난다. 이제 정말 땅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아쉽지만 거품을 타고 나가야 한다. 내일은 꼭 타봐야지. 마지막 하나.
입수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나온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이렇게 많이 떠내려온 줄 몰랐다. 겨우 원래의 장소를 찾아가 몸을 대충 씻고 맥주를 시켜 앉았다. 와룽 주인인 쌍둥이 형제가 새로 설치했다는 조명이 별처럼 반짝이고 아이들이 꺄르르 공놀이에 한참이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러 국적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웃음소리에 섞인다. 어젯밤에 4시간밖에 자지 못한 나는 몽롱하고 이 순간이 흐릿하다. 방금 전 바다에서 느낀 기분이다. 이것도 그것도 꿈인 걸까.
나는 과거 대부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가끔 어떤 일은 너무나 선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흐릿한 기억 속 두드러지게 선명하여 오히려 존재하지 않았던 일 같다. 재밌지. ‘현재’라는 시간은 너무 선명해서 지금과 같이 흐릿해질수록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데, ‘과거’라는 시간은 정반대다. 그리고 이건 딴 소리인데 나는 종종 말을 내뱉은 뒤 내가 방금 말을 한 것이 맞을까? 소리는 어디로 간 걸까. 나의 말은 어디로 간 걸까.라고 생각한다. 흩어지고 사라진 나의 말들이 마치 원래 없던 일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실존하는 시간의 개념은 ‘현재’ 밖에 없단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조금 어지러움을 느끼는데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바람에 멀미를 한 걸지도 모르겠다.
사진 : 현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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