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했다. 서핑에 미쳐 회사를 그만뒀단 이야기 질리도록 들었는데 나도 그 서핑에 미친년놈 대열에 합류했다. 한 회사에서 10년을 꽉 채우고 11년에 접어드는 해다. 처음 입사했을 때가 생각난다. 광고홍보학과를 전공하며 공모전으로 매일 밤을 지새우던 나에게 가장 큰 광고회사에 공채로 합격한 것은 정말이지 감동적인 사건이었다. 합격이란 두 글자를 확인했을 때 미친 듯 뛰던 심장은 아직도 기억난다. 아빠와 엄마에게 전활 했고, 바로 이어 그렇게 큰 회사가 우리 학교 출신은 뽑아줄리 없으니 욕심부리지 말라 말했던 교수님에게 전화했다. 아빠는 기뻐서 30명이나 되는 가족에게 고기를 샀고-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그 자리는 나의 취업보단 상견례를 했다더니 갑자기 파혼하고 돌아온 사촌 언니 이야기가 핫이슈였다- 어느 날엔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와 내가 너무 자랑스럽다고 중얼거리며 잠에 들었다.
퇴사 계획을 세운 건 서른 살 되던 해였다. 양양에서 일출 서핑을 하며 다짐했다. 세계에 가보지 않았던 바다를 가고 타보지 않았던 파도를 타보겠다고. 여행 외에는 해외에 길게 나가본 적 없단 것도 나의 아쉬움 중 하나였기에 기왕 가는 거 아주 길게 가보겠다고. 출발 시점은 회사 10년 차가 됐을 때가 좋겠다. 사실 지금의 일을 좋아하고 사람들도 좋아 떠나기 아쉬우니 경력을 적당히 쌓고 회사를 즐길 만큼 즐기고(?) 떠나면 딱이겠다. 그때면 나이도 35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기에 좋은 나이다. -올해 나는 36살. 코로나로 인해 계획이 1년 미뤄졌다.- 처음 부모님에게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두 분은 놀라울 정도로 덤덤했다. 속마음을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5년 뒤까지 자신들의 딸이 서핑에 미쳐 계획을 실행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이러다가 말겠지. 부모님은 나를 30년을 봐왔지만 어떤 사람인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나 현혜원. 포기를 모르는 여자다.
계획을 세운 뒤 매년 명절이면 부모님에게 나의 계획을 말했고, 3년이 지나서야 두 분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노므 시키가 말하는 본새가 심상치 않다. 진짜 떠날 모양이로구나. 나의 엄마는 아주 쿨한 사람이자 어떤 결정을 하든 마음대로 하라는 주의라 괜찮았지만 가족에게 고기를 살 정도로 딸이 자랑스러웠던 아빠는 속상했다. 남들은 들어가기도 힘든 회사를 왜 제 발로 나오는 것인가. 하지만 나의 한 마디에 그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아빠.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잘못된 일이 있어? 전부 잘 됐지? 그러니까 이번에도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크..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멘트다. 이렇게 자신감 뚝뚝 떨어지는 멘트를 하며 속으로는 벌벌 떨었다. 나도 무서워 아빠. 하지만 이걸 포기한다면 죽기 전까지 생각날 거 같아. 아쉬움이 아니라 후회가 남을 거 같아서 그래. 근데 사실은 진짜 무서워…라고 말할 수 없었기에 꽤나 열심히 살아온 나의 과거를 팔았다. 이 여행을 위해 그렇게 최선을 다해 달려왔나 보다.
여행 계획은 이렇다. 전 세계에서 가장 파도 가성비가 좋고 나의 서핑 스승님이 계신 발리에서 1년. 서핑과 훌라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하와이 2달. 캘리포니아 드림 1달. 서핑 중간중간 예술을 섞어줄 유럽 3달. 총 1년 반의 여정이다. 조금씩 달라지거나 변수가 있을 순 있으나 지금은 이렇다. 이번 달 초에 발리 비행기를 끊었다. 이후 여행은 발리에서 차차 계획을 세우면 된다.
여기까지 글을 읽은 당신은 나를 대단하다 생각하고 있겠지만 진짜 대단한 사람은 나의 남편이다. 겨우 4달 전 나와 결혼한 따끈따끈한 신랑. 그는 결혼을 하자마자 떠나는 아내를 이해해 주는 바다와도 같은 사람이다. 사실 처음 여행 계획을 세웠을 때의 나는 거지 같은 연애만 하는 바보였고 35살이 되기 전까지 결혼을 할 만큼 좋은 사람을 만날 리 없다 생각했다. 심지어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데 지금의 남편이 떡하니 등장한 것이다. 나처럼 서핑에 미쳐 육지에서 제주로-제주는 나의 고향이며 여행이 끝난 뒤 내려갈 예정이다- 이주한 사람. 나처럼 숏 보드를 타는 사람. 나와는 달리 감정의 변화가 적고 잔잔한 사람. 나와는 달리 아주 느린 속도로 세상을 보기에 나의 폭주를 달래줄 수 있는 사람. 세상에 어쩜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남은 삶을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사람의 등장은 계획에 큰 변수였지만 그는 일말의 반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오라며 응원해준다. 정말이지 완벽하다고 백 번을 말해도 모자른 사람이다. 우리 함께 떠나면 좋겠지만 그에겐 키워내야 하는 카페가 있다. 서퍼들의 천국 중문에 마련한 작은 공간. 서핑이 비는 사이 서퍼들이 쉬어가길 바라며 마련했다. 카페 맞은편 작업실에선 보드도 수리한다. 여름이면 작고 큰 딩이 난 보드들이 들어온다. 아쉽지만 겨울에나 잠깐 나의 여행에 합류할 수 있을 듯 하다.
즐거운 서핑 트립 뒤 미래가 어떻게 흘러 갈진 나도 모르겠다. 프리랜서 일을 벌써 시작하고 훌라춤을 갈고닦으며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지만 긴장과 두려움에 종종 사로잡힌다. 하지만 어쩔 방도가 있나. 지금까지 해왔듯 최선을 다하며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빠에게 던졌던 호언장담을 회수해 나 자신에게 던진다. 나는 할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남편과 행복하게 살 것이다. 지금은 당장의 여행에 집중하자. 셀 수 없이 많은 파도가 나를 기다린다. 가슴이 떨린다. 합격 발표를 들었던 그날인 듯하다.
사진 : 현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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