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매거진 팀에게 플랫 매거진에 대한 이야길 들은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나는 제주에 있었고, 남편이 운영하는 중문 카페의 바깥쪽에 앉아 햇빛을 맞으며 기분 좋게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쏴아악. 통화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어느 날 밤엔 저 소리가 마치 파도 소리와 같단 글을 쓴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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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 매거진의 의미를 설명하며 글로서 함께 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질문에 나는 알았다고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을 좋아하고 응원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서핑과 파도에 대한 이야기라면 언제라도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이 있던 탓이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었던 것일까. 그날의 통화 뒤로 수 많은 절기와 계절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서핑이나 파도에 대한 아무런 단어도 문장도 쓰지 못했다.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한 채로 멍하니 앉아 이런 일이 왜 벌어진 걸까 곰곰히 생각했다. 올 여름 서핑 에세이를 한 권 출간하였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화근이었던 걸까. 8년이란 시간 동안 바다에서 마주한 풍경과 생각, 서핑으로 변해버린 삶을 200페이지 넘게 담아냈더니, 그날 이후론 어떤 문장을 써도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책에 쓴 문장들이 내가 서핑에 대해 쓸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르겠단 두려움에 손이 굳는다. 글을 쓴답시고 같은 내용을 변주할 순 없었다. 마침 점점 더 바빠졌고, 바다에 들어가는 날은 줄었다. 더이상 나에겐 바다에게 건넬 문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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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플랫 매거진의 출발을 알리는 게시물을 보았다. 그리고 문장을 읽었다.


When the surf is flat

Don’t panic, Go flat


아차차. 이마를 쳤다. 그렇지. 우리의 서핑에(삶에) 플랫한 순간이 오더라도 괜찮다는 위로를 던져보자 했던 것이었는데, 내가 그 순간을 이겨내지 못하고 패닉에 빠지면 어쩌자는 걸까. 지금이 바로 그 플랫한 순간이고, 우리는 이것마저 즐기기로 한 것 아니었나?! 하여간 나란 사람, 가야할 길을 눈 앞에 두고도 주저 앉는 미련한 습관이 있다. 


드디어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정교하진 않지만 하고 싶은 말들이 조금씩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서퍼 모두가 알고 있듯 파도를 탈 때 왼쪽 방향으로 가고 싶다면 왼쪽을 쳐다보면 된다. 시선이 가면 어깨가 몸통이 허리가 골반이 무릎이 발이 보드가 간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그린 웨이브 위를 달리게 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야할 방향을 아는 것, 그리고 시선을 두는 것. 나의 책에 추천사를 쓴 정재윤 작가는 이것을 두고 ‘사랑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두자’고 표현했다. 그 추천사를 몇 십 번은 읽었는데 오늘날이 되서야 명료히 읽은 기분이다.


지금의 글은 당신에게 건네는 나의 다짐이다. 나의 패닉을 깨닫고 당신의 패닉에게 건네는 공감이자 위로이자 대안이다. 어떠한 일렁임도 없이 잔잔한 바다로 인해 생겨난 패닉 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삶의 권태와 무료함에서 오는 패닉에게도 말을 걸고 싶다.


나는 파도를 기다리며 라인업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좋아한다. 그러다가 다가오는 파도에 문장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패들을 시작해버리는 순간. 일상에서라면 기이한 모습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개의치 않는 그 순간이 좋다. 파도를 잡으면 축하해주고, 파도를 놓쳐 돌아오면 그저 대화를 다시 이어가면 된다. 플랫 매거진에서 나의 글을 마주한 당신이 문장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파도가 오는 바다로 뛰어간다 해도 나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저 앞으로의 문장들이 파도와 파도 사이의 간극, 그 고요한 순간에 조그마한 플랫 플레져가 되길 바랄 뿐이다.
 


사진 : 현혜원

서핑 에세이 : '오늘의 파도를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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